관리 메뉴

맑음 때때로 말랑말랑

세기에 걸쳐 끊이지 않는 기독교의 성령사역, 신비주의에 대한 토론 본문

All about Love♥/Biblelog

세기에 걸쳐 끊이지 않는 기독교의 성령사역, 신비주의에 대한 토론

지노쥬 2012. 5. 12. 01:36



세기에 걸쳐 끊이지 않는 기독교의 성령사역, 신비주의에 대한 토론


교회 안에서는 방언의 은사나 통변의 은사, 치유의 은사 및 예언의 은사 등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실제 일어난다. 이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성령사역'이라고 하며, 이는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와 같은 양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신비주의, 혹은 성령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토론의 장을 열었으며 그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이 성령사역이나 신비주의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1)


고대의 바리세인 부터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카톨릭교도들은 예로부터 율법에 철저히 따르는 엄격한 생활과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항상 절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正)도라고 아는 사람들이다. 반면, 기독교는 조금 다르다. 우리도 물론 율법에 따라 살며 예배하는 삶을 살지만, 유대교나 카톨릭보다는 좀 더 날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신교가 카톨릭과 유대교와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비교적 덜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성당에서는 오르간으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찬송가를 부른다면 기독교는 밴드가 나와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복음성가를 부른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최보수파 장로교는 이런 예배를 금하는 곳도 있다.) 세상의 진단내용에 따르자면, 기독교는 종교로 굳어진 지 얼마안되는 신생종교로 아직 철이 안들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수도 있다. 카톨릭이 수천년 동안 세상 속에서 자리잡고 그 입지를 굳혀나간 것과는 다르게 기독교는 아직 어린아이로 뭣도 모르고 할 말 안 할말 다 하고,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개념없이 저지르고, 욕이란 욕을 다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현상학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그 뿌리를 굳이 찾자면 '성령강조'라는 기독교의 특성이 부각된 것 같다. 아까 언급했던 것처럼 북치고 장구치고 드럼으로 우당탕탕 기타로 지이이잉 거리면서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소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의 음악으로 찬양을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성격이 과연 어떻겠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이 면죄부인 마냥 온갖 죄를 저지르고도 교회에서 회개하고 또 다시 죄를 저지르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고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긴 하지만, 어찌했든 우리가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은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수님의 보혈이 면죄부가 아니다. 회개하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죄를 저지르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그건 솔까말 인간 상식 이하의 행동이 아닌가....ㅡㅡ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비성경적인 모순된 행동이 아니다.) 어찌했든 좀 더 자유로운 성격을 띤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말씀과 율법, 사역, 기도와 예배 등 어느 것 하나가 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성령이 유난히 강조되는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2)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예수님이 다녀가신 뒤로 사도들은 성령을 받으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여러가지 이적과 신비한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이는 신비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방언을 말하게 되거나 방언을 통역하게 되고, 예언을 하게 되고, 병을 치유하거나 귀신을 좇고,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신비주의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오랜 기독교의 역사에서부터 신비주의에 대한 경계가 있었고,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이들은 '이단'으로 낙인 찍혀 축출되었다. 그러한 시대현상은 지금도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한국의 기독교계를 보자면, 지나친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오순절운동파(?) 교파 등을 이단으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성령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비한 현상들에 대한 우상숭배가 일어나거나 하는 것은 마땅히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성령이 말씀보다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어야 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역시 사탄의 장난이다. 실제로 혼자 산기도를 하면서 성령을 받아 여러가지 말씀을 전파하고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단으로 처단을 받은 사람들이 매우 많다.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라거나 모세라거나, 심지어는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물론 이성적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이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들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탄의 음성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실제로 영의 음성에는 성령님의 음성외에도 사탄이나 그 밑의 여러 영적 존재들의 음성들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구별해가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임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고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이러한 잘못된 음성이 있었고 잘못된 방언이 있었다. 이러한 폐단 때문인지, 신비주의를 아예 금기시 하는 극단파가 있다는 사실은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령을 강조하며 여러가지 신비한 음성이나 현상들을 좇아 '선'이 아니고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겠지. 내가 예전에 간략하게 몇 가지 논의하고 싶었던 기독교의 논점들을 써놓은 글을 잠깐 보자; 

2 현대 기독교의 방언기도의 오용
개혁주의 신학(장로교합동측보수파)에 따르면, 1세기 초대교회에 임했던 성령님은 방언으로 '말하는'은사를 주셨지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를 주신적은 없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방언을 오용하는 것에 대해 교정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성경에도 방언을 '말하는' 것은 있지만 방언으로 '기도'했다는 표현이 거의없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거나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제법 언어의 체계를 가진 듯한 소리도 있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불규칙적인 음절을 지속적으로 발음하는 소리도 있다. 성경의 근거해 '방언'은 통역할 수 있는 외국어이고, 불규칙적으로 계속되는 음절 형태의 방언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현대 교회들이 방언에 대해 알고 방언기도를 사모하게 된 것은 1900년대부터 시작된 오순절성령운동으로부터 말미암는데, 이것은 사실무근이라는 소리이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오용과 같은 현상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방언은 성령님의 증거하심을 위해 존재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말하지 말라고 했고, 방언은 꼭 통역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또한 "나는 너희가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 14:5)"라고 했으니, 우리가 방언을 사모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또한 예언의 은사 또한 사모하기를 원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소리가 아닐까? 사도바울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라고 한 것과 같이,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다만,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입만 벌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무엇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받아 방언으로 기도하고, 예언하기도 하며,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 통역을 행하지 않는가? 그 기도와 예언들이 진리의 편에 선 말이라면, 어떻게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여기에 의견을 덧붙이자면, 옛날부터 문제가 되고 논점이 되었던 신비주의의 존재와 상관없이 기독교는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이런 신비주의로 인해 더 부흥했는지도 모른다. 

 

교회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성령사역과 성령은사에 대해서 호의적이며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 들어, 신앙을 레벨로 따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사모하게 되는 것을 많이 봤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기도 하고, 방언을 받기 위한 특별 집회나 수련회, 작정기도를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앞의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방언을 사모하는 이 많은 사람들은 비성경적인 것인가?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누구보다 하나님께 응답을 바라는 사람들인데? 방언을 사모하는 만큼 성경도 더 많이 읽고 기도도 더 많이 할 것이다. 성경에 어디 '방언을 받으려고 기도하지 마라'라고 써있던가? 물론, 이들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방언이 아닌 방언말하기를 위한 방언을 구한다면 그건 그릇되었다. 하지만, 방언 그 자체가, 신비주의 신앙 그 자체가 그릇되다고 하는 주장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방언을 포함한 많은 성령은사와 신비주의 신앙에 대해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없다.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실 지는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그릇된 방언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감히 옳고 그름을 따지며 시비를 논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아예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어찌했든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릇된 길로 들어섰더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당연히 옳은 길로 인도해주시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신비주의 신앙의 성격이라면 하나님을 보다 더 가까이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이다. 글로 된 말씀과는 또 다르게 직접 내 영혼에 머무르시는 성령님과 교통하기 위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온유한 음성을 듣고 싶기 때문에 신비주의 신앙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좋아서, 당신께 더 나아가고 당신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따라가는 그 길이 설령 잘못되었다고 할지언정, 하나님이 그것을 버리시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주의 신앙, 성령사역의 시비를 가리기 전에 우리가 가려야 할 것은 단 한가지,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가고 있는것인가 아닌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1)

그리고 우리가 어느 길을 가든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일어나 빛을 발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일 것이다. 








Comments